양심수의 편지(이길준의경)
나는 감옥에 있다, 당신은?
모범수냐 문제아냐 그런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은 강제노동 수용소에 갇혀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거야.
흐응, 이거 그렇다면 탈출해야 하는거 아냐?
- 마쓰모토 하지메, 가난뱅이의 역습
어느덧 수감된지도 일년이다. 2년의 형기 중에 반을 왔다. 하루하루 지내는 중엔 잘 못느끼지만 돌이켜볼 때면 와,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구나 하고 절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일년이 지났지만 아직 많은 것들이 불편하고 고민스럽고, 그게 참 반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 스스로가 감옥의 일부가 되지않고, 삶의 요소들에 둔감해지지 않는 듯해서 말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불편하게 하는 게 무얼지 고민해본다. 작업이나 교육을 오가면서 몸수색 짐수색을 당하기 위해 옷자락을 풀면서, 점검 때면 지겹도록 앉아번호를 외치고 조용히 하자느니 하는 수칙을 읊어대면서, 급수와 가석방과 징벌 같은 걸 걱정하고 눈치보는 사람들 속에서 느낀 건 이런거다. 우리를 괴롭히는건 '동의에 의한 강압과 감시구조'이고 그걸 유지하는건 그냥 그러려니하고 이런걸 지나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거.
어느 유명한 심리실험에서, 실험자는 특정공간을 교도소로 설정하고 피실험자의 반에게는 교도관 역할을, 다른 반에게는 재소자역할을 맡긴다. 그저 그렇게 역할을 지정했을 뿐인데 피실험자들은 금새 자신들의 역할에 심취한다. 그에 따라 교도관들은 한층더 학대를 심화하고, 재소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며 괴로워한다. 언제든지 그 실험은 중단이 가능하고, 그저 문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데 말이다.
교도관이나 재소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우리 일상에 내재된 잔인함은 대개 개인의 문제라기보단 생각없이 반복되어온 구조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구조에 대해 고민하다보면 다시 개인에 대한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지않고 역할에 만족하는 한 감옥은 계속 유지될 수밖에 없으니까. 과도한 공권력이나 부당한 기득권에 대해 지적하기는 쉽지만 그 힘이 자신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기란 의외로 쉽지않다.
요새 감옥은 예전에 비해 상황이 많이 나아졌고, 직접적인 폭력은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그 대신 이곳을 지배하는 건 점수다. 자신이 끊임없이 평가되고 분류된다는 걸 인지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혜택과 불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재소자들로서는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지적하기 쉽지않다. 몇 번이고 얘기하면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건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위축되어 말하기를 꺼려하고, 어지간한 불편함은 그냥 넘어가고, 그러다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게 되는 거다.
이렇게 적응된 사람들이 나가 맞이할 사회라고 다를게 있을까. 많은 이들이 그전부터 계속되어온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점수와 평가들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인다. 그 틀이 스스로를 가두고 괴롭힌다해도 벗어날 생각을 하는게 아니라 어떻게든 그 안에서 조금더 나은 자리를 차지할 생각을 한다. 결국 그 자리가 한층 더 자신을 조여올텐데 말이다.
당장 눈 앞의 이익과 불익이 너무도 빠르게 제시되는 나머지 많은 사람들이 그게 더 편하다고 믿으며 안주하고, 부여된 역할에 심취하고, 그러는 사이 상상력까지 거세된 건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현실을 힘들어도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거라 위안한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당연한건 아무것도 없다.
왜 다들 비슷비슷한 집과 차에 목숨을 걸어야하지? 왜 모두가 같은 시험을 치르지? 왜 굳이 모두에게 졸업장이 필요하지? 왜 번듯한 직장이 필요하고, 모두가 정신없이 결혼을 해야하지? 그 밖에 우수한 통과의례와 정치적인 사회관념들, 왜?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을거다. 그 모두를 그르지 않지만, 그 견해들은 그 자체로 존중되는거지, 결코 그게 당연하고 그러지 않으면 안될 무엇이어서가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제시되고 동의되는 재료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작은 이익과 평안을 놓치지 않기위해 침묵하면서, 혹은 적극적으로 함께하면서 동의하고 그렇게 굳어진 생각의 한계들이 어느새 우리를 차가운 틀 안에 가두고 있는 거 같다. 이런 틀 안에서 제시되는 몇 안되는 삶의 모델들은 다른 많은 가능성들을 질식시키고, 그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당장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생각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건 정말이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주입받아온 삶과 다른 모습의 삶에 대한 고민을 미뤄온 건 아닐까.
모범수든 문제아든 감옥에 있다는건 다를 게 없다. 주어지는 빈약한 조건들을 놓칠 수 없는 모범수들은 감옥을 더 공고하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감옥을 무너뜨리고 벗어나게 하는 건 문제아들이다. 더 많은 문제아들이 늘어날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지고 나중엔 문제아를 구별하지도 않게 되겠지.
우리가 이곳에서 희망이라는 이름의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수인들이라면 남은 건 역시 탈옥이다. 우릴 가두고 있는 것도, 선고를 무효로 하고 우리를 풀어줄 수 있는 것도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을 다시 짜릿하게 움직여보려면, 자유가 서로에 대한 투쟁과 같다는 공갈을 웃어넘기고 서로에게 자극이 되어보면 어떨까 싶다.
살아온대로, 살아가라는대로 살지 않고도 잘 산다는 걸 이런저런 방법으로 몸소 보여주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감옥은 그만큼 힘을 잃고, 서로의 삶은 가능성들로 풍부해질 것이다. 그렇기에 더 많은 문제아와 변태와 괴짜들이 속속 늘어나 수많은 가능성들에 문을 두드리고, 상상을 제시하고, 원하지 않는 것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강압과 감시를 무력화시키고, 더 자유로워지길 바래본다.
물론, 쉽지않다. 말이 쉽다고 외면하는게 훨씬 쉽다. 춥고 배고프고 떨리고 뭘 해야하나 싶고 애매하겠지. 그런데 자유란게 바로 그런거고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한건 아닐까 싶다. 버거워도 부단히 되새겨보는 자유의 감각이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감옥에서 일년, 난 이렇게 자유를 그리며 지내고 있다. 다시한번, 모두가 더 자유로워지길 바래본다.
2009. 8. 3.
여주교도소에서 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