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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목나무잎새 2011. 5. 1. 22:57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1. 칼 융의 삶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대단히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우리가 기억의 그물로 건져낼 수 있는 최초의 경험들은 몇 살부터의 경험들인가? 융은 놀랍게도 자신이 유모차에 누워서 푸른 하늘과 황금의 햇빛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두세 살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도 팔십이 넘은 나이에 말이다. 아무래도 그는 망각의 기능을 상실한 운명을 지닌 사람이었나 보다. 그는 역마살과 같은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이유 때문에, 소년시절에 많은 발작증세를 앓았다. 실로, 마음은 감수성의 크기만큼 세계에 민감ㅋ하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고통스러운 느낌은 오히려 자기만의 내면의 세계로 발걸음을 인도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융에게 있어서 세계에 대한 고독은 내면에 대한 탐구로 전이되었다.
융은 어느 날 깊은 숲 속에 숨어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아버지는 아들 융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많은 재산을 없앴고, 아들이 평생 돈을 벌 수어 없게 된다면 슬픈 일이 될 것이라고 친구에게 말하였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아버지와 친구분의 대화를 엿들었지만, 융에게 있어서 그 대화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융에게 있어서 그 대화는 현실에 대한 최초의 경험이 되었다. 융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아버지 서재로 달려가서 라틴어 문법책을 꺼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몇 번의 발작증세는 융에게 나타났고, 결국 융은 굽히지 않고 발작을 극복하고 끈질기게 공부를 계속해 나갔다. 이후 융은 발작증세가 사라졌다. 이러한 경험은 자신을 철저하게 엄격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이후 융으로 하여금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데 일생을 바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2. 칼 융의 사상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
융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자기와 자아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는 우리의 생각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세계이다. 무의식의 밑바닥에 깊이 놓여 있는 세계이다. 또한 그 세계는 집단 무의식의 운형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자아는 자기의 세계보다 훨씬 작은 세계이다. 그리고 의식과 분별의 세계이다.
자아는 자기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의식의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의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식으로서의 자아는 무의식으로서의 자기를 지각할 수 있을까? 그것은 꿈이다. 꿈은 무의식의 활동이 우리의 인식 속에 지각되는 현상이다. 자기는 끊임없이 자아에게 꿈의 상징들을 통하여 자기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 이제 꿈은 자기와 자아가 만나는 접촉점이다. 나를 넘어선 세계와 나의 세계는 꿈을 통하여 이어진다. 그래서 융은, 꿈이야말로 현대인에게 있어서 어느 것과도 비교 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고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꿈의 언어를 잘 이해하는 길이 저 심연에서 고요히 놓여있는 자기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자기와 자아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사건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한 등산가가 융을 찾아왔다. 그는 산가는 어느 날 밤 높은 산의 정상에서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 자신의 꿈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융은 그 꿈을 다 듣고 등산가의 앞에 닥쳐올 위험을 알았다. 그리고 융은 꿈이 주는 경고를 강조하여 그에게 스스로 등산을 자제 하도록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였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등산 중에 발을 헛디뎌 허공으로 낙하하였기 때문이다. 자기는 자아의 미래를 감지하고 그곳은 꿈으로 전달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등산가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융은 의식적인 이성이 자신의 미래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두컴컴한 순간일지라도, 인간의 무의식은 정확히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융에게 있어서 자기실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가 무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원형의 세계에서 뿜어내는 진실한 목소리를 감지하는 것, 그 과정은 바다위에서 출렁거리는 파도와 같은 자아가 수천 해리 깊이를 가진 마음의 중심인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하지만 중심으로 향해 가는 과정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다. 특히 상징과 신화의 언어를 상실한 현대일수록 자아가 자기를 찾는 여정은 그만큼 힘겨워진다. 왜냐하면 분화된 의식으로서의 자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세계를 내동댕이쳤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과 신화의 상실은 자기 상실이다. 이러한 상실의 시대를 가로질러 어둠의 세계인 자기의 세계를 빛의 세계인 자아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과정 이 깨달음의 과정, 즉 자기실현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실로 그 깨달음의 과정은 한 인간의 삶과 죽음 사이에서만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인류를 한 개인으로 볼 때, 우리는 인류가 무의식의 힘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과 같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은 문명된 상태에서 도달하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월들을 버텨 서서히, 그리고 힘들여 의식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가 온전히 완성되기에는 아직은 거리가 멀다. 저 안개와 같은 인간 본성의 허다한 부분이 아직 어둠에 쌓여 있다. 그 자아의 세계는 빛이 닿지 않는 무한한 자기의 세계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한 세계일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은 자연이 획득한 매우 새로운 것이어서 그것은 아직도 실험적 상태에 있다. 실로 의식은 불완전한 기능이다. 이렇듯 인류는 험난한 진화의 과정을 통하여 자아의 세계를 열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아는 끊임없이 자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인류는 무의식의 힘에 의해 이끌리고 있고 무의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융은 원형, 집단무의식, 개성화, 그림과, 아니마, 아니무스등 다양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개념을 사뭇 조심스럽게 선보인다. 사실 융이 인류를 향해 새롭게 선보인 개념은 몇 개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개념은 앞으로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개념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왜냐하면 그의 개념은 이론가의 책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철저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진지한 숙고의 과정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융은 일생동안 수만 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았다. 그리고 융은 분석가나 이론가이기 이전에 영혼의 의사로서의 순결한 사명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삶 가운데서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삶의 목적은 환자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호하고 보존하여 화자가 그의 생애를 그 자신의 뜻에 따라서 살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환자에 대한 따스한 시선은 병든 의사만이 치료할 수 있다는 융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렇듯 융의 삶은 환자의 고통을 치유하려는 삶이었고, 환자의 고통과 같이 하는 삶이었다.
한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에 대한 융의 사려 깊고 진지한 노력은 그의 삶의 여러 곳에 스며있다. 특히 환자의 꿈에서 드러난 상징을 분석가가 해석하는데 있어서 환자의 상징과 분석가의 임상결과에서 일반화된 의미를 쉽게 대응시키지 말라고 융은 당부한다. 융은 상징을 연구하는데 반세기 이상을 보내온 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상징과 그 상징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분석가 개인의 일반화된 이론을 미련 없이 버려야 함을 강조한다. 회색 이론은 삶을 찢는다. 오히려 나는 환자의 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세로 환자를 만나야만 한다고 말한다. 환자의 상징은 환자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환자의 삶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총해야만 그 상징의 의미가 올바로 드러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융에게 있어서 꿈 해석의 보편적인 규칙은 없었다. 환자의 삶만이 유일한 해석의 경전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환자는 자신의 이론의 적용대상이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만이 유일한 현실이다. 이러한 융의 자세는 이후 프로이드와 영원히 결별하게 돈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이드는 꿈 해석에 있어서 보편적인 이론을 만드는데 관심이 있었다면, 융은 인간 그 자체에 관한 이해 위에서만 꿈의 해석이 가능 하다는 점에서 화해할 수 없는 견해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3. 신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동시성 현상

융의 일생은 정신의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신의 불멸과 맞닿아 있는 신의 문제와 정신의 사멸과 맞닿아 있는 죽음의 문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1959년 융은 영국 방송공사(BBC)의 죤 프리만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프리만은 융에게 신을 ale느냐고 질문을 하였다. 영국의 수많은 시청자들은 융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며 긴장하였다. 융은차분하게 대답하였다. 나는 신을 압니다. 저 대답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의미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인 신의 세계까지도 접근해 들어간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바울이 그러하였듯이 융은 자신으로부터 뗄레야 떼어낼수 없는 마음 안에 내재하는 신을 경험한 것은 아닐까.
융은 자신의 삶 가운데 죽음을 아주 가깝게 체험하곤 하였다. 실제로 융은 죽은 자를 만나기도 하였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융은 기이한 환상을 경험한다. 융은 밤중에 깨어 전날 장례를 치룬 친구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문득 융은 죽은 친구가 방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후 친구는 수백 미터 떨어진 자신의 집으로 융을 데려갔다. 융은 친구를 따라갔다. 그리고 친구는 서재에서 적색 표지의 책 한권을 가리켰다. 너무도 기이한 체험이어서 융은 다음날 아침 죽은 친구의 서재를 직접 찾아가서, 환상에서 가리킨 적색 표지의 그 책의 제목을 확인해 보았다. 그 책의 제목은 死者의 유산이었다.
융은 실제로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방법을 마흔한 살이 되던 1941년에 개인적으로 내놓았다. 이 설법은 죽은 자들이 질문을 하고 융이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문헌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융은 죽은 자와의 대화를 하였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 문헌은 융이 죽기 바로 전에 어렵게 세상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결론부에 있는 글자 수수께끼인 아나그람마는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 암호의 열쇠를 공개하지 않고 융은 죽었던 것이다.
우리는 일상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한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한번 왔었다는 느낌, 혹은 현실에서의 이순간은 언젠가 꿈에서 한번 보았던 순간 같은 느낌을 자주 경험한다. 사실 융의 삶의 대부분은 이러한 환상과 희귀한 체험으로 채색되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날 융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순간 뒷머리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환자 가운데 한사람이 권총자살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총알은 마침 융이 심한 통증을 느낀 부분에 박혀 있었다. 1918년 융은 영국인 수용소의 지휘자로 있으면서, 자기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모습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 그림은 황금의 성 모양을 한 만다라였다. 얼마 뒤에 리햐르트 빌헬름이 융에게 보낸 책 안에는 융이 그렸던 만다라 그림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융은 이러한 정신적 사건과 물질적 사건의 의미 있는 일치를 동시성 이론으로 부르고, 이와 같은 정신현상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 한다. 사실 융이 최초로 이론화한 동시성 이론은 우리시대의 양자물리학적 세계상의 정신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많은 과학자들은 융의 저 이론에 대하여 다각도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실로 융에게 있어서 텔레파시나 예언현상은 신비한 체험이나 주관적 환상이 아니라 자명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4. 결론: 칼 융이 주는 의미

첫째, 융은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중심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문명화된 의식이다. 의식은 자아의 세계이다. 이 자아라는 것은 자기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는 우리의 중심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는 우리의 중심인 자기를 향해 나아가야 하겠다. 우리는 자아의 세계가 전부 로만 착각하며 살아간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자기의 세계와 같이 설명되지 않는 세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의식과 무의식의 해리는 자아의 세계를 전부로 생각하는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있어서 의식과 무의식의 해리는 자아의 세계를 전부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의 자리에서 노예의 자리로 추방당하였다. 우리는 중심을 상실하였다. 현대인의 마음은 에덴동산을 상실한 보헤미안의 서글픈 운명이 맺혀 있다.
융은 희미한 잔영으로만 남아있는 자기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왔고, 오늘 우리에게 그 세계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건네주고 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내면에 가장 깊은 곳에 고여 있는 자기의 세계는 너와 내가 서로 넘나드는 화해의 세계이고 통합의 세계이다. 그 세계는 보다 보편적이며 진실한 세게이고 영원한 세계이다. 오히려 그곳은 그늘에 가이워진 세계가 아니라 빛의 세계이다. 그리고 중심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꿈을 통하여, 신화를 통하여, 상징을 통하여 자기의 세계에서 자아의 세계를 향해 건네주는 메시지에 우리는 귀를 모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의식의 치명적인 손실은 꿈에 의해 보완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저 깊은 내면의 무의식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하겠다.
둘째, 우리의 세계는 설명 가능한 세계만이 전부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특히 자아의 세계 안에서의 이성이라는 것은 지극히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으로는 마음의 전체성을 결코 파악할 수 없다.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판적 이성이 지배하면 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곤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우리가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삶을 통합할 수 있다. 의식을 넘어선 세계에 대한 겸허함을 상실한 채, 이성의 왕국으로만 전진하려는 현대문명의 기나긴 행렬은 사실 막대한 손실을 지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 문명은 합리성에 의하여 바벨탑을 축조하였다. 완고한 탑의 벽돌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합리성의 질료는 비합리성을 신화로 매도하였다. 왜냐하면 바벨탑의 세계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시대는 비합리성이 사멸한 시대이다. 그렇다면 비합리성은 존재하지 않는가. 단지 이성의 등불이 건져내지 못하는 심연의 세계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는가. 단지 이성의 등불이 건져내기 못하는 심연의 세계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바벨탑이 감내해야할 불길한 징후를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심연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치 빛이 소멸하고 어둠에 깃든 저 밤하늘에는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저 별만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연은 존재를 망각케 한다. 하니만 존재는 심연에 앞선다. 오히려 존재는 어둠을 품는다. 심연과 어둠에 서 있는 존재는, 비록 설명되지 않을 지언정, 자명한 존재이다. 그해서 은폐되어 있고 불가해한 존재는 모르는 존재가 아니가. 사실 비합리적인 것은 모르는 것이나 인식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 심지어 우리는 그것에 관하여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조차도 이름붙일 수 없을 것이다. 이름은 존재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실로 융의 동시성 이론이나 죽은 자와의 대화는 우리의 이성이 얼마나 빈약한 기능인가를 예증해 준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고 설명되지는 않는 세계가 우리 가까이에 있고, 그리고 그 세계가 우리를 인도한다고 융은 말한다.
셋째, 융은 우리 각자의 생이 매우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인간 심성의 뿌리에는 저 깊은 무의식의 세계, 전체의 세계와 닿아 있다. 그렇다면 각자의 생은 결코 가볍거나 보잘 것 없는 생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은 우주를 닮아 있다. 영원의 세계인 무의식의 현현이 각자의 생인 것이다. 플레로마의 세계에서 클레아투라의 세계로 뛰어든 최초의 사건이 생이다. 우리의 생은 불멸의 무한한 세계가 유한한 세계 속으로 뛰어든 사건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생은 끊임없는 성숙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그 지향이 바로 개성화인 것이다.
우리는 융을 통하여 살아있음이 결코 예사스럽지 않음을 발견한다. 이제 환희이고 생명은 경이로움이다.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펄럭거리며 비상하는 저 새를 보자. 새는 날기 위하여 얼마나 지난한 시간동안 새가 되려는 꿈을 꾸었을까. 인간은 인간이 되고 싶어서 얼마나 긴 계절을 인간의 꿈을 꾸었을까. 인간은 백년의 삶을 만나기 위하여 백 만년 동안 그 한 순간 만을 꿈꾸어 온 존재이다. 백 만년 겨울잠의 기나긴 제의를 통하여 우리의 삶은 주어진 것이다. 우리 삶의 밑둥에는 백 만년의 지난한 세월을 견뎌온 뿌리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단지 백년을 사는 삶이 아니다. 우리는 백 만년을 몸으로 살아가는 푸른 생명나무이다. 그 생명나무가 가장 찬연한 열매를 맺는 그 순간, 그 절묘한 순간이 바로 지금의 생이다. 그러기에 생은 저 영원의 빛의 드러남이다. 또한 지금의 생은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구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어디론가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꿈은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에게 예언한다. 꿈이란 자기와 자아가 체험하는 두 지대의 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은 삶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중심의 소리이다. 꿈은 삶의 해리를 통합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말하였다면, 융은 꿈이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라고 지금 우리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꿈을 타고 우리에게 건너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서늘하게 만났던 융에 대한 감정은 이제는 따스한 할아버지로, 예리한 관조의 시선을 총하여 우리의 상한 영혼을 치유해 주는 영혼의 의사로, 오늘의 가난한 마음과 가난한 문명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하는 천상의 헤르메스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꿈은 마음의 가장 깊고, 가장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 작은 문 이며 그 문은 저 우주의 태고 적 밤을 향하여 연다. 그것은 아직 자아의식이 없던 시기의 마음이었고 자아의식이 일찍이 도달할 만한 곳을 훨씬 넘어서 있는 마음이 될 태초의 밤이다.


5. 융의 저서

•무의식(無意識)의 심리학(心理學) (Wandlungen und Symbole der Libido)
여기에서 그는 리비도 개념을 성적(性的)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어떤 에너지로 봄으로써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는 다른 자신의 분석심리학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프로이트의 수제자로 인정받았으나 결국 이 저서로 인해 그와 관계를 끊었다.
이 책의 학문적 업적은 인간의 성격을 '내향형'과 '외향형'으로 나눈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