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 Ivan Illich, 1926-2002 )
1. 생애
일리치는 근대사회를 예리하게 비판해온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반 일리치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1926년에 태어났다. 로마의 그레고리언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에는 미국 뉴욕시의 교구 신부였으며,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에서 부학장으로 일했다.
1960년대에는 푸에르토리코와 멕시코에 비교문화 연구 센터를 설립했다.
그가 설립한 연구소 ꡐ문화간 자료센터(Centro Intercultural de Documentacion, CIDOC)ꡑ은 숱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1980년대에는 미국과 멕시코, 독일을 오가며 강의를 했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탈학교사회 Deschooling Society 1971>
<공생을 위한 방법 Tools for Conviviality 1973>
<에너지와 공평 Energy and equity 1974>
<의료의 한계 Limits to medicine : medical nemesis : the expropriation of health 1976> 등
일련의 저작을 내놓으면서였다.
한 실화로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캠퍼스의 어느 강당, 이반 일리치는 강당을 반쯤 채운 청중 속에서 그의 친구 한사람을 알아보았다.
20세기의 지도적 철학자 중의 한사람인 일리치는 막 말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연단을 훌쩍 떠나 한 조그마한 소년 ― 그의 어머니와 함께 강연장에 들어온 크리슈나라는 어린애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때 가톨릭 교회의 신부였고, 신학과 역사와 화학 분야의 학위를 가지고 떠돌이 학자이기를 고의적으로 선택한 사람 ―
그는 수십년 동안 '전문가들'을 괴롭혀왔다. 그의 방법은 그 전문가들의 '사회적으로 형성된 확신'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 그 일리치가 소년 크리슈나의 눈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기 위하여 연단에서 내려온 것이다.
이런 일은 대학의 형식적인 의전(儀典)을 흔히 거부해온 사람으로서 일리치에게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어떤 특정한 기관과도 제휴하기를 거절하면서 일리치는 매년 펜주립대학과 독일 브레멘대학의 객원교수로서 학기를
나누어 쓰고, 나머지 수개월간은 케르나바카 교외에 있는 어느 멕시코 마을에서 집필을 하면서 지낸다.
11개의 언어를 말하는 일리치는 열두권에 이르는 저서와 많은 에세이를 위하여 방대한 범위에 걸쳐 연구해왔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많은 연구에 대하여 그 자신 거리를 유지하려고 해왔고, 그에 못지 않게 그러한
연구 기관에 소속됨으로써 받아들여야 하는 물리적 제약을 극히 피하려고 한다.
그 자신의 말을 빌어, 그는 "입자를 쪼개는 자들, 파동 기계공들, 담론 해체론자들 및 그 동류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독립적이고 예리한 지성은 현대사회의 가장 '신성한 암소들'에 관계하여 행사되어 왔다.
여러 해에 걸쳐 일리치는 교육과 교통체계와 종교와 의료의 '탈제도화'를 주창해왔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그러한 제도들이야말로 "인간 삶의 가장 좋은 것들을 가장 치명적으로 망쳐놓은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사회사상가이며 평론가인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지난 2002년 독일 북부 브레멘에서 타계했다.
76세. 사인은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의 한쪽 뺨에 자라고 있는 커다란 혹이 주는 고통으로 자신의 하루가 시련을
견뎌내는 시험기간으로 변하고 있는데도 그는 '비인간적인 의료산업'에 의한 진단이나 치료를 거부하다 세상을 떠났.다.
무엇보다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진정성은 푸에르토 리코와 멕시코 등 제3세계 민중사회에서의 현장체험을 통하여 서구식
산업문명체제의 근본적 허구와 폭력성을 뿌리로부터 증언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시장경제와 산업주의라는
서구식 개발논리가 어떤 방식으로 제3세계 사회의 토착적 삶의 지혜와 기술을 깊이 훼손하고, 대다수 민중이 인간다운
존엄성을 갖고 살 수 있는 조건을 박탈하는가를 철저하게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과정에 있어서 '공생공락'(conviviality)이라는 개념이 일리치에게 핵심적인 열쇠였다.
경제성장과 개발, 그것을 기초로 하는 '진보'의 형이상학에 대하여 우리가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무엇보다 ― 자동차 중심의 현대적 교통체계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듯이 ― 사람끼리의 '공생공락'을 처음부터
불가능하게 하는, 배타적 경쟁의 논리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일리치의 주된 관심은 유럽의 옛 문화, 특히 12세기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중세 유럽 문화 쪽으로
기울어져왔다. 지금도 진행중인 일리치의 이 방면에서의 작업이 갖는 의미는 아마도 좀더 기다려본 뒤에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초점의 이동은 역사와 현실로부터의 퇴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문명에
대한 비판이 훨씬 더 근본적이고 깊이 있는 것이 되기 위한 노력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점의 이동이라고 하지만, 일리치의 관심은 본질적으로 예전이나 다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근년에 이르러
그가 자주 언급하는 컴퓨터를 비롯한 첨단기술이 '인간다움의 근거'를 훼손하는 문제는 기실 일리치의 초기 저술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일리치에 의하면, 산업주의체제가 배격되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빈곤이나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좀더 근본적으로 인간이 인간다운 위엄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본조건을 갈수록 망가뜨리기
때문인 것이다.
심화되는 산업기술문명 속에서 이제 가장 큰 재앙은 인간이 기계나 로봇의 처지로 격하(格下)되어간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일리치의 발언이 주는 큰 매력은 ― 그리고 어쩌면 상당한 어려움은 ―
그러한 생각이 투박한 사회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극히 섬세한 말투로 전달되고 있다는 데 있다.
어떤 기성의 학문적 . 사상적 틀도 단호히 거부하고 독창적인 통찰력으로 산업사회의 모순구조를 파헤쳐 온 일리치는
본질적으로 극히 부드럽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로 보인다.
2. 철학사상
<공생을 위한 방법>을 통해 그는 근본적인 독점(radical monopolies)이라고 부른 현상을 비판하면서 이를 대체할 대항적인
생산성(counter productivity)이라는 기본적인 논점을 드러내 보였다. 그 책의 서문에서 일리치는 우정의 중요성과우정이
성립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 즉 자기절제의 중요성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오늘날 "청빈의 개념은 타락해버렸고, 청빈이라고 하면 쓰디쓴 맛이 느껴질 뿐이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청빈은 우정의 기초를 형성하는 '절제되고 창조적인 유희'의 바탕이었다.
일리치는 청빈은 "즐거움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올바른 인간관계를 파괴하거나 외면하는 것만을 배제하는 덕성"이라고 한
아퀴나스의 견해에 동의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정과 자기절제는 좋은 삶에 있어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리치의 방식으로 이해되는 이러한 자기절제는 오늘날 유행하는 개념들 ― 자구책이니 자기관리니 또는
심지어 자기자신과 환경에 대한 책임감이니 하는 것들(일리치는 이 모든 것을 '해방심리학'이라고 부르면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 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지구공동체'(이것은 일리치에게 모순어법의 예이다)의 '지속가능한 개발'을 장려하면서 모금운동을 벌이는 환경주의자에 응답하여
사람이 자동차나 원자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또, 누군가가 절제된 생활방식 ― 즉 개인적 자유가 사람들 사이의 상호의존성
속에서 실현되는 '공생공락'의 삶 ― 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추상적인 '책임감'이나 강요된 '당위성'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인간의
품위에 관해 말하는 사람의 편에 같이 서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본적인 논점을 교육--<탈학교사회>, 에너지문제--<에너지와 공평>, 의료행위--<의료의 한계>에 적용해 보였다.
학교제도를 폐지하고, 차량 속도를 제한하고, 의사의 의료독점 체제를 거부하자는 일리치는 논의는 일면 실현 불가능한 제안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 현대 문명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탈학교사회>는 1975년에 한국에 소개된 이래, 폐쇄적이며 억압적인 학교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우리에게 제공했다.
이 책은 본격적으로 탈근대의 논의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이미 ꡐ학교ꡑ라는 근대제도를 뛰어넘는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에게는
중요한 참고도서가 되었으며, 그것은 최근에 발간된 이한의 <탈학교의 상상력>(2000) 등에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이어서 일리치는 <필요의 역사를 위하여 Toward a History of Needs 1978>
<그림자 노동 Shadow work 1981>
<젠더 gender 1982> 과 같은 저서를 펴냈는데, 이런 저서를 통해 기존의 경제학이 외면하고 있는 문제 즉
경제적인 가치가 모든 가치를 지배하는 경제 독점 체제 그 자체를 겨냥하고 비판했다.
발전만이 우리가 지향해야 될 경제 모델인가. 현대의 경제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림자 노동(무임금 노동)이 필요한데,
산업사회의 그림자 노동은 그 이전 사회의 그림자 노동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현대 경제는 남성과 여성에게 모두 젠더(性) 부재의
상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리치는 현대사회를 사는 인간이 다른 가치의 소중함은 모두 잊어버린 채 경제가치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경제적 인간
(Homo Economicus)으로 변해버렸다고 질타한다.
이후에도 <가나다, 민중의 마음을 순서화하기 ABC: The Alphabetization of the Popular Mind 1988>
<과거의 거울 In the Mirror of the Past 1992>
<텍스트라는 일터에서 In the Mirror of the Past 1992> 등의 저서를 펴냈다.
이들 저서에는 경제과 교육과 역사 그리고 삶의 새로운 이념적 의미를 탐구하는 일리치의 글이 담겨 있다.
3. 교육관련 내용
(1) 일리치의 문제제기의 핵심
학교문제를 다룰 때 보다 근본적인 것은 학습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학습을 상품으로써 취급할 것인가,
아니면 학습자의 자율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출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또한 이는 기존사회에 적합한 사람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드는 교육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교육행위가
어떤 특정기관에 의해 독점되지 않는 새로운 사회에 적합한 교육방식을 택할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① 학교는 사회를 재생산한다
* 학교 - 한 사회의 기존질서를 재생산하도록 만들어진 조직적인 사업체* 현재의 위기 - '교육에 의한 가혹한 수탈'은
학생, 고용자, 납세자 등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 학교는 평등주의 신화를 제공한 반면 졸업장을 통해 계층사회를 합리화하는 모순을 낳았다.
자격결정수단으로서, 사회적 가치수단으로서, 그리고 평등의 대행자의 역할을 담당했던 학교교육 과정의 정통성 상실은
자기재생산수단을 학교에 의지해 왔던 모든 정치제도에 위협이 되고 있다.
② 피상적인 해결법
* 학교의 의식적(儀式的) 측면인 '잠재적 커리큘럼', 즉 자격취득의 기초를 이루는 구조에 대한 고려가 없는 해결책은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잠재적 커리큘럼'이라는 말은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구별하여 '학교교육의 구조'를 의미하는 뜻으로 쓰인다.
③ 잠재적 커리큘럼의 진상
* 잠재적 커리큘럼을 통해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경제적으로 가치있는 지식은 전문가의 가르침의 결과이며,
사회의 자격부여는 관료적 과정에서 이룩한 지위 여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잠재적 커리큘럼은 현재화된 커리큘럼을 상품화하여 그것을 습득하는 것 그 자체를 가장 확실한 부의 취득방법으로 한다.
* 학교의 사회적 기능 - 학습에 대한 욕구를 학교교육에 대한 수요로 전환시키고, 성장의 질을 전문가에 의해 설정된
정찰가격으로 바꾸며 '지식'의 의미를 친밀함이나 교제와 같이 생활경험을 지칭하는 말에서 전문적으로 포장된 제품이나
판매물이 될 자격, 또는 추상적 가치를 가리키는 말로 바꾼다.
④ 소외개념의 확대
* 소외개념을 인간노동의 합목적적, 생산적 활용에 대한 규정에서 인간생활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데까지 확대적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서비스 중심의 경제체제하에서 인간이 자신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물론 자기실현의 가능성으로부터 소외되어 왔고,
노동의 성과를 상품으로 판매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서와 사고까지도 전문가들로부터 치료받지 않으면 안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 저자의 글쓴 의도 및 목적을 알 수 있는 구절 - 우리가 과거의 제도에 대체할 만한 방법이나 학습개념의 강조점을
변화시킬 수 있는 원리를 종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 경제적 조직원리를
제안하는 것이 될 것이다.
⑤ 목표로서는 지나치게 안이한 학교
* 프리스쿨, 실험학교, 자격있는 교사의 채용 등 몇가지 대안들은 모두 예견가능한 한계 내에서 시험되고 있다.
그러나 학교의 '잠재적 커리큘럼'을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 두는 것은 근본적인 비판이 될 수 없다.
⑥ 치레 뿐인 평등
* 학교를 경솔하고도 무비판적으로 폐지하는 것은 위험하다. 도구를 특권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기준이 차별적인 고용 및
승진을 위한 새로운 달성기준과 연결되어 교육의 가장 큰 측면으로 대두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학교에 의해 등급이 매겨지는 것보다 더 특권이나 권력의 축적을 정당화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 따라서 학교교육이 고용, 승진 혹은 도구를 이용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에 적합한 기준이기 때문에 직업과 관계가 있다는
보증을 폐기하고, 학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의식적(儀式的)인 낡은 부분을 배제해야 한다.
⑦ 정치적 목표의 필요성
* 정치적 요구의 의미 - 학교의 폐지와 그와 관련된 교육의 자유에 대한 보장, 학교와는 다른 제도적 방법을 만들기 위한
법적 보호, 정치적 프로그램, 제반 원칙 등을 의미한다.
* 학교폐지를 위해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 조건들
1) 법으로 규정된 취학의 전면 금지
2) 과거의 학력을 근거로 한 모든 차별 폐지
3) 세수입의 통제권을 자선적 제도로부터 개인에게 양도
4) 구체적인 일과 관련하여 인간을 평가 -
각개인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
교수와 학습의 세속화 - 탈학교화는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관리권을 개인에게 돌려주는 것이어야 한다.
⑧ 세 가지의 근원적인 요구
* 정치프로그램의 목표
1) 교수나 학습의 이용을 제한하는 권리의 폐지
2) 획득한 기술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극을 제공하는 것
3) 기술이 보다 넓은 범위에서 습득되고 사용되기 위한 조건에 대한 통찰 - 현재의 산업생산양식을 노동집약적이고
수리집약적(修理集約的)이며, 복잡성이 크게 제한되어 있는 도구나 부품에 의존하는 탈공업화적인 생산양식으로
전환하는 것
⑨ 자명한 교육적 자유
* 문제제기 - 한 사회의 교육수준은 사회구성원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사실과 도구를 각 개인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정도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 바람직한 사회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정의 - 상품과 서비스를 계속 소외시키면서 직업과 집약적 노동과 여가에 가치를
부여하는 과학기술적 사회로의 전환을 실현하는 것, 즉 제도적 배치의 전환이다.
(2) 탈학교사회 (Deschooling Society)
① 왜 학교는 폐지되어야 하는가
* 학교는 아동들에게 목적을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과 혼동하게 한다.
예컨대 건강, 학습, 위엄, 자립, 창조 등과 같은 가치는 이러한 가치의 실현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제도의 작용과 거의 같은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가치의 제도화)* 지금 필요한 연구는 사람들의 인간적, 창조적, 자율적인 상호작용을 돕는 제도이며 또한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에 이바지한다.
* 우리들의 세계관과 언어를 특징짓고 있고, 인간의 본질과 근대적 제도의 본질을 상호 연관지어서 파악하기 위해
이론모델(paradigm; 문제틀)의 소재로서 학교를 선택한다.
* 근대화된 빈곤 - 상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의 결여와 개인으로서의 잠재적 능력의 상실이 결합된 것이다.
빈곤의 근대화는 세계적인 현상이며 현재 사람들의 잠재적 능력을 미개발된 상태로 두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 교육에 대한 재정지출은 빈곤을 심화시킨다. 따라서 제도에 대한 재정지출을 중단한다면 그 제도가 가진 부작용 -
사람들을 무능하게 만드는 부작용 - 으로부터 생기는 한층 더한 빈곤화를 막을 수 있다.
* 학교교육은 가난한 자를 이중으로 착취한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더 많은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에 대해 열등감을
갖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 사람의 교육에 대해서 더욱 많은 공공자금을 할당하고 다수의 사람에게 사회적
통제를 더 많이 받아들이게 한다.
* 학교는 교육을 위해서 이용할 수 있는 자금, 사람, 그리고 선의를 전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학교 이외의 다른
사회제도가 교육에 관여하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고 있다.
* 학교에 관한 역설 - 학교를 위한 지출증가는 오히려 학교의 파괴성을 강화하는 것이 된다.
또한 학교에 의한 교육에 대한 수요충족은 불가능한데 상급학교에 대한 진학의 요구가 커질수록
희소한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비용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증가하기 때문이다.
* 교육기회를 평등화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바람직한 일이며 실현 가능한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을 의무취학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영혼의 구제와 교회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 따라서 학교에 의한 교육의 독점을 헌법에서 폐지하고, 편견과 차별을 합법적으로 결부시키는 제도를 폐지할 필요가 있다.
* 학교는 처음부터 그 사회가 공인한 사회통제의 수단에 적합하도록 교수하기 때문에 자유롭거나 교육적이라고 할 수 없다.
학교제도는 기회를 평등하게 한 것이 아니라 기회의 배분을 독점하고 말았던 것이다.
* 또 하나 학교교육의 근저에 있는 환상은, 모든 학습이 가르침을 받은 결과라고 생각하는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습은 우연하게 일어나게 되는 것이며, 반복연습에 의한 결과이다.
이것은 학교의 정규 교육과정 이외의 활동에 의존한다.
* 학교에 의한 교육자금 독점에 대한 대안
1) 모든 사람들이 어느 기능센터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교육크레디트를 주는 것
2) 편리할 때 필요한 기능을 습득할 수 있도록 '교육구입권리증'(entitlement)를 사용하는 것
* 기능 습득의 기회를 대폭 증가시킬 방법
1) 자격증이 아닌 자격검정을 통해 기능교사의 시장을 조작
2) 기능교사의 '시장'을 개방하는 것,
* 그러나 사회를 탈학교화 한다는 것은, 학습의 본질에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첫째, 기능의 반복적 연습이다. 기능을 교수하는 것은 커리큘럼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을 주장한다면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둘째, 습득한 기능의 개방적이며
탐구적 사용을 장려하는 환경의 정비, 즉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이 필요하다.
자유교육은 학교에 다니는 의무에서부터 해방을 뜻한다.
* 교육을 목적으로 서로 알맞는 친구들을 만나게 하는 것 - 문제의식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기회를 주면 결과에 대해 더 잘 예측할 수 있고, 그만큼 위험성이 적다. 브라질의 교사 파울로 프레이리 또한
이것을 경험에 의해 알고 있다.
* 가장 근본적으로 학교에 대치될 수 있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현재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같은 관심에서, 그것에 관한 학습 의욕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생각하기 위한 기회를
평등하게 주는 봉사망(奉仕網)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동료들을 만나게 하는 것'에 대한 기존의 의견에 대한 반론들
1) '테마'에 관한 탐구는 공동의 커리큘럼과 교사와 같은 권위자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특정한 제목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한다면 리버럴한 학습의 전통에 발을 들여놓는 일이 된다.
2) 대화 상대자의 연령, 배경, 세계관, 능력, 경험 또는 기타의 특징을 알려주는 정보를 포함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3) 회합에 필요한 부수적 원조, 예컨대 장소, 시간표, 참가자의 선발 및 보호를 제공해야 한다.
* 탈학교화된 사회(deschooled society)는 우발적인 교육 또는 비형식적인 교육에의 새로운 접근이다.
따라서 모방이 아닌 참가가 필요하다.
* 의무적인 학교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모든 사회를 두 개의 영역(교육/세속)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즉 교육은 비세속적인 것이며 세속은 비교육적인 것으로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의 본질과도 유사하다.
* 교육의 탈학교화의 성공여부는 학교 속에서 가꾸어지는 사람들이 탈학교화를 위해 리더쉽을 발휘하는 정도에
따라서 좌우될 것이다.
4. 저서
-《탈학교사회》(1971) 형식적인 학교교육은 제도의 경직성, 빈부와 지역적 격차, 지식교육 강조 등으로
학교 본래의 기능인 자유롭고 참된 인간의 성장에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소외, 지배구조의 현상유지 등을
낳고 있기 때문에 형식적인 학교교육의 제도를 지양하고 비공식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배경에는 남미의 보수적인 여러 나라에서 학교가 사회계층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생각한 데 있다. 탈학교사회에서 학교에 가지 못한 사람은 그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하층계급이 되고, 반대로 대학졸업자들은 지배계층이 됨으로써 학교는 국제적인 계급제도를
형성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의무교육의 문제를 거론한다. 그의 견해로는 의무교육은 극소수가 따지만 대다수는 잃게 되어 있는
복권(福券)을 강제로 구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학교를 통하여 교육과 좋은 직업과 사회적 성공을 기대하기 때문에 중도에 탈락하거나 점수를 제대로
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평생동안 낙인이 찍혀지는 것이다.
잔인하기는 고등교육도 마찬가지라고 일리치는 말한다. 고등교육은 학문적 의욕을 고취하고 민주적 시민을
형성하기보다는 특권의 재생산에 더 많이 겨냥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호기심을 죽이고 학생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공생을 위한 방법》(1973)에서는 현대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제도와 기관들을 폭넓게 검토하고 있으며 일리치는
기술공학의 철학과 기술공학에 대한 사회적 비판의 윤곽을 그려 보인다.
일리치는 이 예외적인 책에서 다루어진 주요 주제들을 나중에 나온 여러 책들 속에서 좀더 상세히 검토한다.
-《에너지와 평등》(1974)에서 그는 에너지의 고소비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관계의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사회적 관계 자체를 타락시키며, 속도에 대한 중독 ― 자동차, 비행기 ― 은 사회를 절름발이로 만들고
궁극적으로 비인간화한다고 주장한다.
-《의료의 한계》(1976)는 '보건'과 같은 개념의 역사를 탐구하고, 어떤 한계 이상으로 '건강의 의료화'가 진행되면
그 실제적인 결과는 오히려 반생산적이며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1982년에 나온 책《젠더(性)》에서 일리치는 섹시즘은 산업사회의 불가피한 조건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산업사회는 남녀간의 본래적 관계인 '비대칭적 상보성'을 '법적으로 조작된 평등'의 관계로 전환 . 타락시킴으로써,
남자들과 여자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경제적 존재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러한 세계에서는 대부분의 여성은 언제나 경제적으로 패배하게 될 것이라고 일리치는 말한다.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젠더》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 그의 가장 최근의 책《텍스트의 포도밭에서》(1993)는 과거를 향하여 거울을 비추고 있다.
여기서 일리치는 오늘날 우리가 글을 읽는 방식과 '성(聖) 빅토르의 휴'라고 하는 수도사가 800년 전에
글을 읽었던 방식을 비교하기 위하여 12세기를 탐구하고 있다. 실제로, 일리치가 펜주립대학에서 행한
강연의 주제도 '휴'에 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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